하나님의 살아계신 증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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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문 : 빌립보서 1장 12~14절

 

12  형제들아 내가 당한 일이 도리어 복음 전파에 진전이 된 줄을 너희가 알기를 원하노라
13  이러므로 나의 매임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시위대 안과 그 밖의 모든 사람에게 나타났으니
14  형제 중 다수가 나의 매임으로 말미암아 주 안에서 신뢰함으로 겁 없이 하나님의 말씀을 더욱 담대히 전하게 되었느니라

 

 

우리가 살아가는 동안 다양한 경험을 하게 됩니다.

사람은 태어나면서, 우리의 오감으로 이 세계의 모습을 받아들이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 몸 안에는 다양한 세계의 경험이 축척이 되어 있습니다.

내가 경험해 보지 못한 것을 다른 사람이 경험할 수도 있고, 또 공통적으로 경험할 수도 있습니다.

 

예를 들면, 우리 교회에 우리 나라에서 포크레인을 제일 잘 다루시는 일인자가 십니다.

저는 아직 한 번도 포크레인을 타보지도 못했고, 어떻게 작동하는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거기에 대한 경험은 없습니다.

그러나 집사님은 매일 기계를 다루시는 전문가 이십니다.

그래서 제가 경험하는 것과 이강원집사님이 경험하는 것은 다릅니다.

그러나 같이 식사를 하게 된다면, 서로 같은 음식을 먹기 때문에 같이 맛을 느끼고, 같이 음식을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은 서로 공통점이 있고, 서로 다른점이 있는 것입니다.

 

서로 다른점은 그냥 다르다고 인정해주면 됩니다.

왜 다르냐고 따지지 마십시오.

그냥 다른 겁니다.

그것이 잘못되었다, 잘되었다. 이렇게 평가하지 마십시오.

그냥 다른 겁니다.

소나무와 은행나무가 서로 다릅니다.

어느 것이 더 좋고, 더 나쁘고가 없습니다.

그냥 다르게 생긴 겁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서로 다른 것이지, 더 좋고 더 나쁘고가 없습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이 이렇게 행동을 할 때, 왜 저사람은 저렇게 행동을 하냐? 이러고 따지지 마시고, 그냥 다르구나. 생각하면 아주 마음이 편합니다.

부족한 면도 있고, 잘하는 면도 있는 겁니다.

부부 사이도, 마찬가지입니다.

서로 그냥 다른 겁니다.

그래서 당신은 왜 그러냐... 이러지 마십시오.

좀 천천히 하면, 그냥 천천히 하도록 생긴 겁니다.

좀 빨리하면, 그렇게 빨리하도록 생긴 겁니다.

 

여러분, 운동장에서 토끼와 거북이가 달리기를 했습니다.

누가 빠릅니까?

보통은 토끼가 빠릅니다.

이야기는 이렇게 전개가 됩니다.

운동장에서 토끼와 거북이가 달리기 시합을 합니다.

요이 땅하고 출발 신호가 울리자, 토끼가 열심히 뜁니다. 거북이는 느릿느릿 출발을 합니다.

토끼가 빠르니까, 거북이를 우습게 생각을 합니다.

그래서 토끼가 잠시 잠을 잡니다.

거북이는 우직하게 걷다보니, 결국은 거북이가 결승선에 먼저 들어온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아주 웃긴 이야기입니다.

왜냐하면, 이것은 시작이 잘못되었다는 겁니다.

왜 땅에서 시합을 합니까?

만약에 바다에서 시합을 하게 되면, 누가 이깁니까?

토끼는 거북이의 반에 반에 반도 못 쫓아갑니다.

서로 다른거지, 누가 잘났다 못났다가 아닙니다.

 

그래서 우리는 어떤 생각을 하셔야 하는가 하면,

하나님이 어떤 사람은 느리게 만들었으니 느려서 좋고,

하나님이 어떤 사람은 빠르게 만들었으니 빨라서 좋고,

하나님이 어떤 사람은 남자로 만들었으니 남자라서 좋고,

하나님이 어떤 사람은 여자로 만들었으니 여자라서 좋고.

이런 저런 모양으로 만들었으니 그냥 다 좋은 겁니다.

 

[잠언 16:4] 여호와께서 온갖 것을 그 쓰임에 적당하게 지으셨나니 악인도 악한 날에 적당하게 하셨느니라

 

그래서 여러분, 주님 앞에서 왜 그러냐고 불평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늘 감사하는 자가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어째든, 사람은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 있기에 다양한 경험을 하면서 사는데, 사람들은 자신이 경험한 것을 이야기하는 것을 좋아합니다.

 

그것이 좋은 경험이든, 나쁜 경험이든, 자신이 겪은 일들을 함께 나누고, 공감하고, 서로 느낌을 주고 받으면서 살아갑니다.

그것이 사람이 사는 세상입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이 나누는 이야기를 들어보면,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금방 알 수 있습니다.

그 사람의 주 관심사가 무엇인지 쉽게 파악이 됩니다.

 

만약에 어떤 사람이 돈에 관해서 많이 이야기한다면, 그 사람은 돈이 주 관심사이고, 돈을 굉장히 사랑하는 사람일 겁니다.

어떤 사람이 자녀에 대해서 많이 이야기하고, 나눈다면, 그 사람은 자녀가 가장 중요하고, 자녀를 굉장히 사랑하는 사람일 겁니다.

어떤 사람은 하루 종일 직장에서 일하니까.

집에 오면, 직장에 있었던 일들을 가장 많이 이야기하고, 직장에서 온갖 일어나는 일에 대해서 좋네, 나쁘네. 등등 평가를 합니다.

그 사람은 직장을 가장 관심있고, 삶의 중심이 됩니다.

 

① 여러분은 어떤 이야기를 가장 많이 나누십니까?

 

자신이 가장 중요하고, 가장 관심이 있는 것, 그리고 자신이 경험한 것을 이야기 나누는데, 여러분은 어떤 이야기가 가장 중요하고 중심이 됩니까?

 

보통은 자신의 환경에 관한 이야기를 가장 많이 합니다.

거기서 느끼는 감정에 대해서 이야기를 많이 합니다.

, 육체의 일을 가장 많이 말합니다.

 

안믿는 사람은 그럴 수 있는데, 그리스도인이 그렇다고 한다면, 거기에는 문제가 생깁니다.

 

왜냐하면, 사람은 육체 뿐만이 아니라 영체도 있기 때문입니다.

영체가 뭐냐 하면,

 

[고린도전서 15:44] 육의 몸으로 심고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살아나나니 육의 몸이 있은즉 또 영의 몸도 있느니라

 

육의 몸이 있은 즉 영의 몸도 있느니라

육의 몸을 한자로 육체라고 한다면,

영의 몸을 한자로 하면, 영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대부분 육체가 경험한 것을 이야기하는데, 육체가 아무리 많은 것을 경험해도 거기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한계가 뭐냐 하면, 문제 해결이 되지를 않습니다.

또한 참된 만족이 없습니다.

그것이 육체가 경험하는 것의 한계입니다.

 

또한 육체를 따라 살면, 망합니다.

육체의 경험을 중요시하면, 결국은 지옥에 형벌에 처해집니다.

그것이 무서운 겁니다.

 

[엡 2:2~3] 그 때에 너희는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조를 따르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

3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고,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본질상 진노의 자녀가 됩니다.

그것이 바로 공중 권세 잡은 자를 따라사는 삶입니다.

 

[유다서 1:7] 소돔과 고모라와 그 이웃 도시들도 그들과 같은 행동으로 음란하며 다른 육체를 따라 가다가 영원한 불의 형벌을 받음으로 거울이 되었느니라

 

소돔과 고모라가 불로 심판을 받을 때 왜 불로 심판을 받았느냐 하면, 육체를 따라 가가다 영원한 불의 형벌을 받습니다.

그래서 육체의 경험을 중요시하고, 육체의 만족을 위해서 살면 결국은 망합니다.

, 지옥에 갑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하면,

 

[갈라디아서 5:16]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따라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우리에게 영체가 있는데, 이 영체가 누구를 따라야 한다구요?

성령을 따라 행해야 합니다.

베드로서에는 하나님이 이렇게 말씀합니다.

 

[벧전 4:1~2] 그리스도께서 이미 육체의 고난을 받으셨으니 너희도 같은 마음으로 갑옷을 삼으라 이는 육체의 고난을 받은 자는 죄를 그쳤음이니

2 그 후로는 다시 사람의 정욕을 따르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육체의 남은 때를 살게 하려 함이라

 

이제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하면, 사람의 정욕을 따르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육체의 남은 때를 살아야 합니다.

 

성령을 따라 살지 않으면, 죄를 짓는데, 육체의 고난을 받은 자는 죄를 그치게 되고, 육체의 남은 때를 하나님의 뜻을 따라,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영으로 살아가는 법을 배우고, 그렇게 살아야 합니다.

 

, 우리에게 육체가 있고, 영체가 있는데, 영체가 바로 하나님의 영이신 성령님의 뜻을 따라살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의 삶입니다.

 

내 속에 있는 영이 이 땅에서 하나님을 경험하는 것.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진정한 삶의 모습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내 속에 영이 있는지 없는지 모르는 사람이 있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영은 보이지 않으니까요.

그런데, 여러분이 인정하시든 인정하지 않으시든 분명히 영은 있습니다.

 

② 그것을 언제 아느냐?

 

바로 죽음이 임박할 때 압니다.

육체인 몸은 땅에 묻혀서 썩어지지만, 내 영혼은 이제 주님 앞으로 갈 겁니다.

분명히 영과 혼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영혼이 주님 앞에 갑니다.

그러면, 내 속에 영혼이 있다는 뜻이지요.

 

또 한가지 증거는 이겁니다.

 

[고린도전서 12:3]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알리노니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자는 누구든지 예수를 저주할 자라 하지 아니하고 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

 

내 안에 하나님의 영이 있는데,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자는 예수님을 주님이시라고 고백합니다.

그래서 내가 주여... 하고 부르짖어 기도하는 사람은 반드시 영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 뜻은 이렇습니다.

 

[고린도전서 6:19]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 자신의 것이 아니라

 

내 안에 성령님이 계시고, 내 영도 있는데, 성령님이 내 영에게 예수님은 주님이시다. 라고 말하게 되고, 내 영은 이것을 깨닫고, 내 혼과 육체에게 예수님은 주님이시란다... 라고 말하면, 내 입으로 소리를 내서 주여~~~... 하고 말하게 된다는 뜻입니다.

 

어째든 여러분 안에 영이 있는데, 있다고 치십시다.

 

③ 그러면, 내 안에 있는 내 영이 지금 가장 하고 싶은 것이 뭘까요?

 

밥 먹는 것일까요?

돈 버는 것일까요?

자식 잘되는 것일까요?

명예와 권력을 쥐는 것일까요?

건강한 것일까요?

 

여러분, 반드시 아셔야 되는 것은 내 육체가 원하는 것과 내 영이 원하는 것은 서로 틀립니다.

 

[갈라디아서 5:17]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르고 성령은 육체를 거스르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가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내 영이 가장 하고 싶은 것은 바로 예수님을 만나고, 사랑하고, 그 분의 뜻을 이루는 겁니다.

 

반대로 육체는 예수님을 만나고 사랑하고, 예수님의 뜻을 이루는 것을 싫어합니다.

 

그래서 교회에 나오기 싫은 때가 있지요.

왜 그런지 아십니까?

그것이 바로 육체가 원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사랑하는 예수님을 만나는 것을 아주 기뻐합니다.

그것은 뭐 당연하지요.

예수님 만나는 것이 기쁘지 않으면, 교회에 왜 나옵니까?

그것이 바로 종교 생활인데, 여러분, 종교 생활하지 마십시오.

제가 분명히 말씀드리지만, 지옥갑니다.

 

여러분이 교회에 나오는 이유는 바로 예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나오는 겁니다.

예수님을 만나기 위해서 나오는 겁니다.

왜요? 부활하신 예수님이 주일에 만나주셨기 때문입니다.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라고 명령하신 하나님이 이제는 안식일이 아니라 예수님이 부활하신 주일을 거룩하게 지키는 겁니다.

거룩하게 지킨다는 뜻은 예수님을 뜨겁게 사랑하는 마음으로 주일에 예수님을 만나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그 만남을 일주일 내내 여러분의 일터에서 유지하는 것을 배우고 실천하라는 겁니다.

 

그래서 내 영이 계속해서 예수님을 만나게 되면, 어떤 일이 생기느냐 하면, 바로 그것이 자신의 경험이 되는 겁니다.

사람은 자신이 경험한 것을 이야기 하지요.

예수님을 사랑하고, 사랑하는 분과 함께 경험한 것을 사람은 당연히 이야기 하게 되어져 있습니다.

 

저는 자녀들이 밖에 나갔다 오면, 자녀들이 무엇을 했는지 궁금해서 물어봅니다.

누구를 만났냐, 만나서 무슨 이야기를 했냐,

만나서 무슨 음식 먹었냐... 등등.

궁금해서 물어봅니다.

여러분은 안그러세요.

또 어떤 때는 제가 물어보지도 않았는데, 자녀들이 밖에 나가서 한 일을 미주알고주알 이야기를 합니다.

저는 재미있게 듣습니다.

 

여러분, 이와 같은 겁니다.

여러분이 예수님을 만나고, 경험했다면, 반드시 예수님 얘기를 하게 되어져 있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 일주일 내내 예수님 이야기를 한 번도 안한다.

그것은 딱 하나입니다.

예수님을 만나지 않은 사람입니다.

자신이 경험하지 않은 것을 어떻게 이야기합니까...

 

반대로 자신이 예수님을 만난 경험이 있다면, 어떻게 이야기 하지 않을 수 있습니까....

 

오늘 본문이 바로 그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지난 시간에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바울이 빌립보에서 귀신 들려 점치는 여종의 귀신을 쫓아냈더니, 그 주인이 바울과 실라는 고발해서 무진장 매를 맞습니다.

그리고 감옥 갖혔는데, 감옥에서 주님을 찬양하고 기도하니까.

하나님의 권능이 임해서 옥문이 열리고, 그 옥문을 지키던 간수가 예수를 믿게 되었다는 이야기입니다.

 

바울은 하나님을 경험했습니다.

바울은 예수님과 함께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과 함께 있다보니, 예수님을 경험하게 된 것이지요.

더 나아가 바울이 만난 예수님을 그 주위 사람들이 경험했다는 겁니다.

 

vs 13. 이러므로 나의 매임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시위대 안과 그 밖의 모든 사람에게 나타났으니

 

모든 시위대 안과 그 밖의 모든 사람에게 드러난 겁니다.

뭐가요? 바울이 감옥에서 철로된 수갑으로 단단히 묶여 있었는데, 그것이 저절로 풀렸다는 것을 안 겁니다.

... 하나님이 살아계시는구나...

이것을 안 것이지요.

이것을 경험한 것이지요.

그래서 그렇게 경험한 하나님의 권능을 사람들이 전한 겁니다.

자신이 경험한 것을 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자신이 만난 하나님을 어떻게 숨겨 둘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어떤 일이 벌어졌는가 하면,

 

vs 14. 형제 중 다수가 나의 매임으로 말미암아 주 안에서 신뢰함으로 겁 없이 하나님의 말씀을 더욱 담대히 전하게 되었느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겁 없이 더욱 담대히 전하게 되었습니다.

바울을 신뢰하게 되었다는 겁니다.

바울이 믿는 하나님이 살아계시니까.

그 분을 믿으라고 담대히 말하게 되었다는 겁니다.

 

하나님은 영이시고, 우리의 영은 하나님을 만나기를 원하고, 우리의 영체가 하나님을 만나게 되면, 그 만난 기쁨이 우리에게 있게 됩니다.

그것은 감출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그 증거들이 드러나게 됩니다.

 

하나님을 찬양하게 됩니다.

하나님께 기도하게 됩니다.

하나님께 예배하게 됩니다.

그것이 정말 내 영혼의 기쁨이요 즐거움이 됩니다.

그리고 그 기쁨과 즐거움은 이웃에게 전하게 되는 것입니다.

 

예배 드리고 났는데, 기쁨과 즐거움이 없어요.

그것은 예배를 잘못드린 겁니다.

잘못드렸다는 것은 다신 말해서 예수님을 못 만난 겁니다.

왜 못 만나게 됩니까?

그 이유는 딱 하나입니다.

사모함이 없기 때문입니다.

예배를 통해서 예수님 만나야지...

이런 마음을 먹으셔야 합니다.

 

[잠언 8:17] 나를 사랑하는 자들이 나의 사랑을 입으며 나를 간절히 찾는 자가 나를 만날 것이니라

[시편 42:1] 하나님이여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 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니이다

[시편 63:1] 하나님이여 주는 나의 하나님이시라 내가 간절히 주를 찾되 물이 없어 마르고 황폐한 땅에서 내 영혼이 주를 갈망하며 내 육체가 주를 앙모하나이다

[시편 9:1] 내가 전심으로 여호와께 감사하오며 주의 모든 기이한 일들을 전하리이다

[시편 86:12] 주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전심으로 주를 찬송하고 영원토록 주의 이름에 영광을 돌리오리니

[시편 119:2] 여호와의 증거들을 지키고 전심으로 여호와를 구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시편 119:10] 내가 전심으로 주를 찾았사오니 주의 계명에서 떠나지 말게 하소서

[시편 119:145] 여호와여 내가 전심으로 부르짖었사오니 내게 응답하소서 내가 주의 교훈들을 지키리이다

 

내가 온 마음으로 주를 찾고 만나고 주를 찬양하고, 전심으로 부르짖는 것입니다.

그럴 때, 하나님이 우리를 만나주십니다.

내 영이 주를 만나는 것입니다.

내 영이 주를 만나면, 그것이 내 영의 기쁨이요.

내 영의 기쁨이 바로 얼굴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얼굴의 얼은 영을 뜻입니다.

굴은 들어가는 입구를 말합니다.

영의 입구가 바로 얼굴입니다.

영이 지금 어떤 상태인지를 여러분의 얼굴을 통해서 영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④ 그러면, 영이 지금 가장 하고 싶은 것이 뭐라구요?

 

바로 예수님을 만나고, 사랑하고, 그 뜻을 이루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 예수님 사랑하는 것은 바로 말씀 암송이다.

예수님을 만나고 그 뜻을 이루는 것은 부르짖어 기도하는 것이다.

그래서 암송과 기도를 통해서 우리가 늘 깨어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 중에 내 영의 기도가 있는데, 그것이 뭐다... 바로 방언이다.

 

[고린도전서 14:14] 내가 만일 방언으로 기도하면 나의 영이 기도하거니와

 

그래서 내 영은 또한 방언으로 기도하기를 원한다는 겁니다.

이것은 여러분 당연한 겁니다.

우리가 오해하는 것 중의 하나가 방언을 받는다는 겁니다.

여러분, 방언은 받는 것이 아닙니다.

방언은 내가 영으로 말하는 겁니다.

 

아이가 태어났습니다.

그 아이가 한국말을 합니다.

그러면, 그 아이가 한국말을 받아서 한국말을 합니까?

아니면, 아이가 자라면서 당연히 자연스럽게 한국말을 합니까.

아이에게는 말하는 능력이 있고, 말하는 방법을 배우면, 자연스럽게 말하는 겁니다.

 

마찬가지입니다.

내 안에 영이 있고, 성령님이 계시면, 내 영은 자연스럽게 말하는 겁니다.

성령님의 지도하에 내 영은 당연히 영의 말을 하는 것입니다.

방언은 내 영의 기도인데, 방언을 받는 것이 아닙니다.

내 영은 방언을 할 능력이 있고, 방언하는 방법을 배우면, 자연스럽게 방언으로 하는 겁니다.

 

한국 아이가 한국말 한다고 대단한 것이 아닌 것처럼 우리의 영이 방언을 말한다고, 대단한 것이 아닙니다.

... 당연한 것을 대단하다고 합니까.

방언을 못한다는 것은 방언을 안한다는 것이지, 방언을 할 능력이 없다는 뜻이 아닙니다.

아이가 말을 안하려고 하면, 어쩔 수 없이 말을 못합니다.

그것은 안하는 거지, 못하는 것이 아닙니다.

마찬가지로, 나도 방언을 하지 않으려고 하면, 어쩔 수 없이 방언을 말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안하는 거지, 할 능력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방언 말하기를 원하십시오.

그리고 성령님께 방언 말하겠다고 말하시고 결심하십시오.

내 영이 기도하겠다고 결심하십시오.

그러면, 내 영이 기도하게 됩니다.

방언으로 기도하게 됩니다.

그러면, 내 영이 얼마나 기쁘고 자유로운지 모릅니다.

사람이 말못하면 답답하잖아요.

마찬가지로, 내 영이 기도하는 것은 하나님께 비밀을 말하는 것인데,

하나님께 비밀을 말하지 못하니 얼마나 답답합니까...

 

[고전 14:1~2] 사랑을 추구하며 신령한 것들을 사모하되 특별히 예언을 하려고 하라

2 방언을 말하는 자는 사람에게 하지 아니하고 하나님께 하나니 이는 알아 듣는 자가 없고 영으로 비밀을 말함이라

 

이것은 차차 말씀 드리겠습니다.

어째든, 여러분, 내 영이 있고, 그 영에게 말씀을 먹이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이 뭐냐? 말씀 암송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고, 만나는 것이 뭐라구요?

바로 기도이다... 라는 것을 꼭 기억하시고 신앙 생활하시기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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