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살로니가전서 2장 7~10절]
7 우리는 그리스도의 사도로서 마땅히 1)권위를 주장할 수 있으나 도리어 너희 가운데서 유순한 자가 되어 유모가 자기 자녀를 기름과 같이 하였으니
8 우리가 이같이 너희를 사모하여 하나님의 복음뿐 아니라 우리의 목숨까지도 너희에게 주기를 기뻐함은 너희가 우리의 사랑하는 자 됨이라
9 형제들아 우리의 수고와 애쓴 것을 너희가 기억하리니 너희 아무에게도 폐를 끼치지 아니하려고 밤낮으로 일하면서 너희에게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였노라
10 우리가 너희 믿는 자들을 향하여 어떻게 거룩하고 옳고 흠 없이 행하였는지에 대하여 너희가 증인이요 하나님도 그러하시도다
질문 하나 하면서 시작하고자합니다.
1) 사람은 가만히 놔두면, 진리와 가까워 질까요? 아니면 멀어질까요?
2) 여러분들이 예배를 통해서 말씀을 전혀 듣지 않는다고 하면, 여러분은 성경 말씀대로 살까요? 아니면 못살까요?
3) 내가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도 외우지 않는다면, 여러분은 말씀대로 살까요? 아니면 못살까요?
사람이 아무것도 안하고 가만히 놔두면, 진리인 말씀대로 살 것 같지만,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을 전혀 듣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을 외우지 않는다면, 그는 결코 진리인 말씀대로 살 수가 없습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교회에 나와야 하는 이유이고, 이것이 바로 우리가 암송을 해야 하는 이유입니다.
우리는 내 마음대로 세상을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말씀대로 삶을 살아가도록 자신 마음을 바꾸어 가도록 하나님이 그렇게 우리를 만드셨습니다.
[롬 12:1,2]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2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영적 예배를 통해서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으라고 말합니다.
제가 늘 말씀 드리지만, 영적 예배를 드리기 위해서는 반드시 말씀 암송을 해야 합니다.
왜요?
지난 주에 말씀 드린 것처럼 하나님의 말씀의 지식으로 여호와를 경외하기 때문입니다.
말씀의 지식이 없는 사람은 하나님을 경외하지 못합니다.
즉, 영적 예배를 드리지 못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내 몸을 영적 예배로 드리기 위해서 우리는 말씀 암송을 해야 하고, 그 다음에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야 하는데, 마음이 새롭게 변화되는 것은 바로 생각의 변화입니다.
생각의 변화는 두 가지 방법으로 이루어지는데, 하나는 암송하면서 성령님이 내 마음에 말씀하시고, 다른 하나는 예배 중 설교를 통해서 생각의 변화가 이루어집니다.
그런데, 말씀 암송도 안하고, 설교도 듣지 않으면, 사람은 결코 마음에 변화가 일어나지 않습니다.
즉, 진리의 말씀대로 살지 못한다는 겁니다.
사람은 가만히 놔두면, 좋을 것 같지만, 그는 결국은 멸망으로, 지옥으로 떨어지게 될 것입니다.
그것은 자연 현상을 봐도 그렇습니다.
사과 나무에서 떨어진 사과는 가만히 놔두면 썩습니다.
냇가에 가서 물고기를 살펴보면, 물고기는 물이내려오는 방향으로 머리를 둡니다.
그리고 끊임없이 꼬리를 흔듭니다.
흐르는 물에 저항해서 계속 버티는 겁니다.
그래야 건강하게 삽니다.
그런데, 죽은 물고기는 꼬리를 흔들지 않습니다.
그냥 물이 흘러가는데로 떠내려 가 버립니다.
사람의 육체도 운동을 하고, 자꾸 움직여야 건강해집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아무 것도 안하고 그냥 밥 먹고, 일하고, 돈벌고, 놀고, 쉬고, 세상 사람이 하는 것처럼 살면, 편하고 좋을 것 같지만, 그 사람은 이미 죽은 물고기와 같습니다.
결국은 부패하고 썩어져서 천국과는 점점 멀어지게 되어져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어떻게 해서든지 발버둥을 치면서 말씀과 떨어지지 않으려고 애를 쓰셔야 합니다.
말씀과 다르게 살면서도 그것이 안전하다라고 생각하면 큰 일납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불법이 있습니다.
그것은 말씀대로 살지 못하는 것을 뜻합니다.
사람들이 볼 때는 아무 문제가 없어도 하나님이 보실 때는 그것이 진리에서 떨어져 사는 아주 불쌍한 인생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말씀과 다르게 살면서도 자신은 잘 살고 있다고 착각을 하는데 있습니다.
어떻게 하면 말씀대로 살까 고민하고, 주님께 도움을 구하고, 잘 살아보려고 몸부림을 쳐야 하는데, 그냥 무덤덤하게 이때까지 살아왔으니까 앞으로도 이렇게 살면 되지 하면서 무감각하게 사는 것이 문제가 됩니다.
구약에도 등장하지만 신약 복음서에서 예수님이 활동하던 당시에 자주 등장하는 질병이 하나 있습니다.
현대 의학에서 이미 극복한 병인데, 바로 나병입니다.
예전에는 이것을 문등병이라고 했습니다.
나병에 걸리면, 살이 썩어져 가는데, 특이한 것은 몸의 고통을 못 느낀다는 것입니다.
발에 못이 찔려도 아프지가 않다는 겁니다.
무감각하다는 것.
이것이 나병의 특징입니다.
[누가복음 5:13] 예수께서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시며 이르시되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 하신대 나병이 곧 떠나니라
① 왜 성경에서는 이런 질병이 자주 등장할까요?
저는 이렇게 생각을 합니다.
이것이 바로 오늘날 마음에 나병이 걸린 사람이 많으며 그것을 그냥 놔두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심각한 병인 줄 알고, 예수님의 치유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마음에 나병이 걸린 것이 뭡니까?
죄가 들어와서 내 마음과 양심과 영혼을 더럽게 하고 죄의 고통으로 내 영혼이 괴로워도 내 몸과 마음은 아무렇지도 않은 겁니다.
예를 들면, 어떤 사람이 화를 냅니다.
화를 내도, 아무렇지도 않은 겁니다.
왜요? 그것이 너무나 당연한 거니까요.
물론, 화를 낼 수도 있습니다.
그것이 상대방에게 상처를 주고, 나에게도 상처를 주고, 모두를 힘들게 하는대도 아무렇지도 않습니다.
화라는 것이 지옥에서 올라오는 불화살인데도 불화살을 자기 마음에도 쏘아서 자기 마음에 불화살이 꽂히고, 상대방의 마음에 불화살을 쏘아대서 꽂아 놓고도 아무렇지도 않은 겁니다.
범사에 감사하며 살아야 하는데, 불평과 근심과 걱정을 하면서 살아도 아무렇지도 않은 겁니다.
말씀과 다르게 살아도 전혀 상관이 없습니다.
성경의 말씀인 진리와 다르게 불법을 저질러도 아무렇지도 않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이 바로 마음에 나병이 걸린 겁니다.
하루 종일 예수님 생각은 하나도 하지 않고 살면서 돈과 세상 일에는 너무나 관심이 많아서 입만 열면, 어떻게 돈벌고 잘먹고 잘살까... 말하면서 살아도 일주일 내내 아무렇지도 않은 겁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바로 영혼에 나병이 걸린 겁니다.
영혼은 너무나 고통스러운데, 우리의 생각과 몸은 전혀 고통을 못 느끼는 겁니다.
우리는 교회에 다니면서 이것을 치유 받으셔야 합니다.
마음의 나병을 치유받고, 마음과 영혼이 건강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마음과 영혼이 건강한 사람은 조금이라도 가시가 있으면, 견디지를 못합니다.
조금이라도 죄가 들어오면 그것이 너무나 고통스러워서 주님 앞에 엎드려 용서받고, 치유를 받지 않고서는 살 수가 없는 사람입니다.
② 그리스도인은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바로 자신의 영혼을 잘 관리하는 자가 되셔야 합니다.
자신의 영혼을 잘 관리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말씀 암송을 하셔야 합니다.
왜요? 영혼이 건강하기 위한 필수 조건이 잘 먹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영혼은 무엇을 먹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먹습니다.
[마 4:4]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기록되었으되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하였느니라 하시니
말씀을 안 먹는 사람은 전부가 영양 실조에 걸린 사람입니다.
아사 상태에 있는 사람입니다.
그런 분은 절대로 영혼이 건강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영혼이 건강하기 위해서는 말씀을 암송하면서, 말씀을 잘 먹으셔야 하고,
둘째는 말씀을 잘 살피면서 자신의 생각과 마음을 고쳐 나가야 합니다.
즉, 내 생각의 변화, 마음의 변화가 일어나야 합니다.
그 중에서 오늘 본문을 통해서 우리가 변화시켜야 할 마음이 이것입니다.
vs 8. 우리가 이같이 너희를 사모하여 하나님의 복음뿐 아니라 우리의 목숨까지도 너희에게 주기를 기뻐함은 너희가 우리의 사랑하는 자 됨이라
사랑의 마음을 갖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최종적인 신앙의 목표입니다.
주님이 나를 사랑하셨듯이 나도 내 이웃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랑하라고 하면, 사랑이 무엇인지를 모르는 경우들이 허다합니다.
예수를 안믿는 사람들이 하는 사랑을 마치 예수 믿는 사람들이 하는 사랑과 같은 것으로 생각하는 경우들이 태반입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사랑은 세상 사람들이 말하는 사랑과는 전혀 다른 것입니다.
우리가 가장 유심히 살펴보아야 할 사랑은 고린도전서 13장의 사랑입니다.
거기서의 사랑은 아무리 능력이 있고, 아무리 믿음이 있고, 아무리 자기 희생을 하더라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 것도 아니고 아무 유익이 없다고 합니다.
자식을 위해서 몸바쳐 희생하시는 부모들이 있습니다.
자기가 못 먹고, 자기가 못 쓰고, 자기가 못 자고, 자기가 못 입으면서 자녀를 애지중지 키웁니다.
그런데, 그것이 사랑이 아닐 수 있다는 겁니다.
[고전 13:3]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
③ 그러면, 성경이 말하는 사랑이 뭐냐?
[고전 13:4~7]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시기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5 무례히 행하지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며
6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7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먼저 오래 참습니다.
상대방에 대해서 참지 못하고 막 말하는 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그는 좀 더 오래 참을 수 있어야 합니다.
온유하고, 시기하지 않습니다.
남이 잘되는 것을 부러워하지 않습니다.
마음이 따뜻합니다. 마음이 부드럽습니다.
사랑은 자랑하지 않습니다.
자기 자랑을 하지 않습니다.
교만하지 않습니다.
무례히 행하지 않습니다.
즉, 예의 바르게 행동합니다.
사랑은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않습니다.
나의 만족을 위해서 상대방을 이용하지 않습니다.
내가 당연히 가져야 하지만, 양보할 줄 압니다.
자기의 유익보다는 상대방의 유익을 위해서 삽니다.
사랑은 성내지 않습니다.
성을 내는 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상대방에게 잘되라고 막 화를 내는 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사랑은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않습니다.
남이 나에게 잘못해도, 그대로 갚으려고 악한 마음을 먹지 않습니다.
사랑은 불의를 기뻐하지 않고, 진리와 함께 기뻐합니다.
즉, 주님의 말씀을 사랑하고, 말씀대로 살려고 합니다.
그래서 사랑은 모든 것을 참고, 모든 말씀을 다 믿으며,
성경에서 말씀하시는 모든 말씀이 다 이룬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이 이루어질 때까지 견딥니다.
이것이 사랑입니다.
그래서 성경에서 말하는 사랑을 하기란 불가능합니다.
그것이 내 힘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늘 주님을 의지하고, 말씀 암송하고, 주님의 이름을 부르면서 내 자신을 날마다 돌이켜보면서 내 마음에 사랑이 있는지를 점검해야 합니다.
바울 사도도 하나님의 사랑을 배우고,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고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자라면서 사랑을 실천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어떤 모습을 보여주었습니까?
vs 7. 우리는 그리스도의 사도로서 마땅히 권위를 주장할 수 있으나 도리어 너희 가운데서 유순한 자가 되어 유모가 자기 자녀를 기름과 같이 하였으니
마땅히 권위를 주장할 수 있으나 도리어 유순한 자가 되었다는 겁니다.
사람은 당연히 받아야 할 권리가 있으면, 그것을 받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합니다.
그것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화가 납니다.
그런데, 사랑이 있으면, 화가 나지 않고 유순한 자가 됩니다.
예를 들면, 목사님에게 오늘 이런 광고 부탁합니다. 라고 요청을 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하다보니까 광고를 못했습니다.
그러면, 여러분의 마음은 어떻겠습니까?
아니... 목사님이 내 의견을 무시했네.
왜 광고를 안해주는 거지.
기분이 나쁘네... 이러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사랑이 있으면, 유순한 자가 됩니다.
그럴 수도 있지.
목사님도 사람인지라 깜빡할 수도 있지...
그렇게 이해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갖는 것.
그것이 바로 사랑입니다.
우리는 절대로 이웃에 대해서 율법의 잣대를 가지고 살아서는 안됩니다.
그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규칙을 정해 놓고, 그 규칙대로 안했다고 따지고 화를 내고 혼내고 다투고 싸우는 것을 해서는 안됩니다.
그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어떤 분들은 나는 절대로 이것은 안해 라고 하는데, 그런 말을 하시면 안됩니다.
왜요? 절대로 안해라고 하는 것을 하면 어쩌려고 합니까?
사람은 그렇게 사는 것이 아닙니다.
나의 삶의 규칙은 이런 거야.
그러면서 스스로 규칙을 만들고 거기에 얶매여 사시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거기에 방해되는 것을 아주 싫어하고, 심지어 자기를 방해하는 자들을 미워하고, 더 나아가서, 자기를 방해하는 자들에 대해서 악한 영아 물러가라... 이럽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사랑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유순한 자가 되는 것입니다.
유모가 자기 자녀를 기름과 같이 하는 겁니다.
유모는 헬라어로 "트로포스" 라고 하는데,
영어로는 nurse. 즉 간호사를 뜻합니다.
간호사가 환자를 돌보듯이 한다는 뜻입니다.
간호사가 환자를 어떻게 돌봅니까?
자기 자녀를 기름과 같이 합니다.
기름과 같이... 헬라어로는 "달포"라고 하는데.
즉, 따뜻하게 하다, 소중히 여기다. 애정깊은 돌봄으로 양육하다.
이런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즉, 간호사가 자기 자녀를 따뜻하게 돌보고 양육하는 겁니다.
간호사가 환자가 아프다고 하면, 왜 아프냐고 혼냅니까?
아니지요. 어디가 아프세요.
안 아프게 해주려고 최선을 다해서 도와주지요.
마찬가지로, 내 이웃이 잘못했습니다.
그러면, 너는 왜 못하냐. 이러지 않고, 어리고, 잘못하니까.
어떻게 하면 도와주지... 이래야 합니다.
말씀대로 못살면,
너는 왜 말씀대로 못사냐... 이러면 안됩니다.
너는 왜 규칙대로 못하냐... 이러면 안됩니다.
암에 걸린 환자에게 너는 왜 암에 걸렸냐... 이러면서 혼내면 어쩌라는 겁니까.
암에 걸리신 분도 걸리고 싶어서 걸렸겠습니까.
다 약하니까 걸린 것이지요.
말씀대로 못사는 것도 아직 믿음이 없고, 아직 어리니까 못사는 겁니다.
그는 좀 더 자라야 합니다.
그는 좀 더 사랑을 받고, 좀 더 시간이 필요합니다.
그 때까지 좀 여유롭게 기다려주어야 합니다.
오래 참아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내 옆사람을 비판하고, 따지고, 판단하고 하면 안됩니다.
즉, 잔소리 하지 마세요.
그냥 그렇구나. 하면 끝.
그리고 그것이 정말 참기 힘들면, 내가 더 성장하면 되겠구나 하면 됩니다.
내가 믿음으로 더 성장하고, 내가 사랑으로 더 성장해야지 하고. 그렇게 자신의 마음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사실, 다 큰 어른은 어린 아기가 노는 것을 보면 귀엽습니다.
애들끼리 별것도 아닌 것에 싸우기도 하는 것이 이쁘고, 자기 혼자 먹으려고 이기심을 부리는 것도 귀엽고, 실수하고 넘어져도 예쁩니다.
왜요? 그럴 수 있으니까요.
그것이 어른입니다.
그런데, 어른이지만 아기와 같은 사람이 있습니다.
오랜 세월 살면서 나이가 좀 있지만, 생각하는 것이나 행동하는 것이 어린 아기와 같은 사람이 있습니다.
그 사람은 좀 더 자라야 합니다.
자라지 않는다고, 야단 칠 필요는 없습니다.
유순하지도 못하고, 자기의 권위를 내 세우고,
9절의 말씀처럼
vs 9. 형제들아 우리의 수고와 애쓴 것을 너희가 기억하리니 너희 아무에게도 폐를 끼치지 아니하려고 밤낮으로 일하면서 너희에게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였노라
이웃을 위해서 수고와 애를 쓰지도 않습니다.
이웃에게 폐를 끼칩니다.
손이 많이 가는 분들이 있습니다.
늘 돌봐주어야 합니다.
그런데, 성숙한 사람은 이웃에게 폐를 끼치지 않습니다.
그리고 열심히 하나님의 복음을 전합니다.
즉, 말씀대로 살면서, 말씀을 삶으로 보여줍니다.
vs 10. 우리가 너희 믿는 자들을 향하여 어떻게 거룩하고 옳고 흠 없이 행하였는지에 대하여 너희가 증인이요 하나님도 그러하시도다
어떻게 거룩하고 옳고 흠 없이 행하였는지 그것을 이웃에게 보여줄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그렇습니까?
바로 믿음과 사랑에 성숙한 사람이 그런 것입니다.
이런 사랑의 삶을 살아가는 것이 우리의 최종적인 목표입니다.
이것은 예수님이 이 땅에서 보여주신 사랑하는 삶의 모습입니다.
목회자인 저도 사랑의 삶을 살도록 좀 더 자라야 할 것입니다.
자랄 때까지 여러분들이 좀 더 인내해 주셔야 합니다.
여러분도 사랑 안에서 자라도록 열심을 내셔야 합니다.
우리의 삶의 기준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내가 예수님만큼 자라지 못했다면, 내가 얼마나 신앙 생활 잘하는지 우리는 자랑하지 마셔야 합니다.
예수님 만큼 자란 분은 또한 자신이 얼마나 사랑이 많은지 자랑하지 않을 겁니다 .
왜요?
예수님의 사랑은 절대로 자랑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루 하루 자신을 돌아보면서 주님을 붙잡고,
주님을 닮으려는 노력이 계속해서 있으셔야 합니다.
가만히 있어서는 안됩니다.
지금 아무 것도 안하면, 그는 결코 주님을 닮아 갈 수 없을 것입니다.
죽은 물고기는 강물이 쓸려 내려가듯이 아무 것도 안하는 분은 세상에 쓸려서 천국과 멀어질 뿐입니다.
우리는 매일 말씀 암송하시면서 내 속에 계신 예수님을 본 받아서 매일 사랑 안에서 성숙해져 가야 합니다.
그것을 놓치면, 신앙 생활을 잘못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성장하고 성숙해질 시간이 많은 것 같지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시간이 얼마나 빨리 지나가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변화되어져 가는 우리의 마음은 그렇게 빨리 변화되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끊임없이 오늘도 주님의 말씀을 붙잡고 씨름하셔야 하며,
주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자가 되기 위해서 자신을 점검하고,
내 이웃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자가 되기를 힘쓰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