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살로니가전서 2장 17~20절]
17 형제들아 우리가 잠시 너희를 떠난 것은 얼굴이요 마음은 아니니 너희 얼굴 보기를 열정으로 더욱 힘썼노라
18 그러므로 나 바울은 한번 두번 너희에게 가고자 하였으나 사탄이 우리를 막았도다
19 우리의 소망이나 기쁨이나 자랑의 면류관이 무엇이냐 그가 강림하실 때 우리 주 예수 앞에 너희가 아니냐
20 너희는 우리의 영광이요 기쁨이니라
우리가 사는 세상에는 너무나 많은 일들이 일어납니다.
러시아의 침공으로 우크라이나의 국민들은 전쟁의 엄청난 고통 속에 있구요.
빈곤의 문제도 있구요.
이별의 아픔도 있구요.
물론, 사랑의 결혼식도 있구요.
갈등, 비난, 이혼, 싸움, 폭행, 이간질 등등 수 많은 고통들이 수반되기도 합니다.
또한 그리움도 있고, 아쉬움도 있고, 따뜻함도 있고, 친절과 상냥함도 있습니다.
사람이 살아가면서 수 많은 일들이 있는데,
그것을 우리가 어떻게 받아들이느냐 하는 것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사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어떤 일이 일어나면, 그것이 운명이거니 하고 생각을 합니다.
자연스럽게 세상 살면서 일어나는 일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자녀들이 부모로부터 고통을 당합니다.
어린 자녀들은 그것을 벗어날 방법이 없습니다.
그래서 생각을 합니다.
내가 벗어날 방법이 없으니, 그려려니 하고 받아들이고, 참는 수 밖에 없다.
이런 생각을 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어떤 가정의 아이들은 아빠가 술만 먹고 들어오면,
밤새 자지 못하게 하고, 때리기도 하고, 욕을 하기도 합니다.
그런 가정에서 자란 아이들은 참 불행합니다.
그런 아이들은 거기서 나올 방법이 없을 겁니다.
나올 방법은 가출하거나 빨리 성장해서 그 집을 나가는 겁니다.
또 어떤 분들은 직장을 다니던지, 사업을 하던지 하는 일마다 안되는 겁니다.
사업을 하면, 사업이 망하고, 직장을 다니면, 직장이 없어지던지, 해고를 당하던지... 그럽니다.
잘되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러나 자신의 일이 잘 안되면, 얼마나 속상하고 얼마나 안타깝고 얼마나 자신이 무능력하고, 한탄스러운지 모릅니다.
여러분도 그렇지요.
예수를 믿으면, 잘되야 정상입니다.
성경에는 하나님이 자녀들에게 복을 주시고, 복을 주시면서도 넘치게 주시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말 3:10]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의 온전한 십일조를 창고에 들여 나의 집에 양식이 있게 하고 그것으로 나를 시험하여 내가 하늘 문을 열고 너희에게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붓지 아니하나 보라
복을 넘치도록 주시는데, 쌓을 곳이 없도록 부어주십니다.
누구에게요?
온전한 십일조를 주님께 드리는 자에게 주십니다.
그것이 정상입니다.
아멘...
그런데, 복이 차고 넘치도록 받으시는 분들이 얼마나 될까요?
자신이 그렇게 복을 차고 넘치도록 받는다고 생각하시는 분들이 그리 많지 않습니다.
앞으로 우리 교회 성도님들은 차고 넘치도록 받고 있을 겁니다.
① 그런데, 문제는 보통 교회를 다닌다고 하시는 분들은 왜 하나님의 약속과 달리 복을 받지 못할까요?
또한, 간혹 우리는 어려움을 당합니다.
힘들고 고통스러운 터널을 지날 때가 있습니다.
아픔도 있고, 슬픔도 있습니다.
그것을 부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저도 자녀들 때문에 응급실에 가서 몇 시간씩 지냈던 적도 있습니다.
또한 맹장이 터질뻔 해서 수술한 적도 있습니다.
병원에서 보낸 시간도 많습니다.
우리가 겪는 고통들을 참고 견디는 것이 마치 당연한 것으로 여깁니다.
그리고 간혹 이런 말씀을 자신에게 적용도 시킵니다.
[약 1:2~4]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당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3 이는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 줄 너희가 앎이라
4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
그래서 여러 가지 시험을 당할 때, 온전히 기쁘게 여기며 인내를 온전히 이루기 위해서 참고 또 참습니다.
그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또 이런 말씀도 있지요.
[약 1:12] 시험을 참는 자는 복이 있나니 이는 시련을 견디어 낸 자가 주께서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생명의 면류관을 얻을 것이기 때문이라
시험을 참는 자가 복이 있는데, 시험을 참는 자에게 생명의 면류관을 주님이 주십니다.
그래서 생명의 면류관을 얻기 위해서 우리는 시험을 참아야 한다고 생각을 합니다.
② 그렇다고 한다면, 시험은 우리에게 생명의 면류관을 얻도록 참는 훈련을 하도록 하나님이 주신 것일까요?
하나님이 우리에게 인내의 훈련을 시키느라고
고통을 주시고, 어려움을 주시고,
힘든 상황으로 몰아가셔서 우리의 인격이 더 주님 닮아가라고 일부러 주시는 것일까요?
우리가 믿는 하나님이 참으로 그런 분이십니까?
사실, 우리가 현실 속에서 여러 가지 시험을 당하지만, 시험을 하나님이 주시는 것은 아닙니다.
왜요?
[약 1:13] 사람이 시험을 받을 때에 내가 하나님께 시험을 받는다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악에게 시험을 받지도 아니하시고 친히 아무도 시험하지 아니하시느니라
하나님은 우리에게 시험을 주지 않습니다.
친히 아무도 시험하지 아니하시느니라
그러면, 사람이 시험을 받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왜 시험, 어려움, 고통, 괴로움을 당합니까?
[약 1:14~15] 오직 각 사람이 시험을 받는 것은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됨이니
15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
시험을 받는 이유는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됨이니... 라고 말합니다.
미혹되었다는 겁니다.
미혹이라는 단어는
헬라어로... 델레아조...
라는 단어로
미끼로 꾀다, 유혹하다... 라고 하며, 미끼라는 단어에서 유래가 되었습니다.
그러면, 미끼를 던지는 애가 있을 것 아닙니까?
나는 유혹해서 넘어뜨리려는 것이 있고, 거기에 넘어 가서 우리가 시험에 드는 겁니다.
나를 유혹하는 미끼가 무엇입니까?
③ 나를 시험에 들게하는 미끼의 종류가 어떤 겁니까?
자기 욕심.
즉, 사람에게는 본성상 자기 욕심이 있는데, 그 욕심을 통해서 시험에 빠지게 만든다는 겁니다.
아담과 하와를 꼬신 것이 바로 자기 욕심입니다.
선악과를 따먹게 만든 것이 바로 자기 욕심입니다.
그러면, 우리에게 의문점이 듭니다.
하나님이 아담과 하와를 만들 때, 자기 욕심이 있게 만들었느냐?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아주 멋지고 아름답게 만드셨습니다.
그런데, 뱀이 다가와서 하와를 유혹할 때, 뱀이 하나님의 말씀을 비비꼽니다.
그럴 때, 하와는 말씀을 정확하게 기억하지 못합니다.
선악과를 먹으면, 반드시 죽는다고 하나님은 말씀하셨는데,
하와는 어떻게 대답을 하느냐 하면,
[창 3:3] 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열매는 하나님의 말씀에 너희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 하셨느니라
하나님이 언제, 만지지도 말라 하셨고,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 했습니까?
그렇게 하와에게 의심이 들어가자.
뱀이 얼릉 하와의 말을 가로채서 이렇게 말합니다.
[창 3:4,5] 뱀이 여자에게 이르되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5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
뱀의 말을 들은 하와는, 뱀의 말에 귀를 기울인 하와는 선악과를 보게 됩니다.
그 때, 이미 어둠의 기운이 하와에게 미친 겁니다.
뱀이 가지고 있던 욕심이 하와에게 미친 겁니다.
그래서 하와가 어떻게 했습니까?
[창 3:5] 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 여자가 그 열매를 따먹고 자기와 함께 있는 남편에게도 주매 그도 먹은지라
하나님이 하와를 시험한 것이 아닙니다.
뱀이 미끼를 던졌고, 하와가 자기 욕심이 끌려서 하나님이 먹지 말라고 했던 선악과를 따 먹은 겁니다.
그 결과 어떻게 되었습니까?
아담과 하와는 죽게 되었는데, 몸이 죽은 것이 아니라 영혼이 죽었고, 영혼이 죽었다는 것은 하나님과 단절이 되었다는 겁니다.
하나님과 단절이 된 이유는 바로 죄 때문입니다.
[이사야 59:2] 오직 너희 죄악이 너희와 너희 하나님 사이를 갈라 놓았고 너희 죄가 그의 얼굴을 가리어서 너희에게서 듣지 않으시게 함이니라
죄 때문에 하나님과 나 사이가 멀어지게 되었고, 내가 기도를 해도 하나님이 듣지 않으시는 겁니다.
그래서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약 1:15]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
욕심이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 즉 사망을 낳느니라.
그러면, 우리가 고통을 받는 이유가 무엇인지 밝혀졌습니다.
내게 사망과 같은 어려움과 고통이 오는 이유는 자기 욕심 때문입니다.
자기 욕심이 있을 때, 마귀는 그 욕심에게 다가와 미끼를 던집니다.
그래서 우리가 그 미끼를 탁하니 물면, 죄를 짓게 되고, 죄가 자라게 되면, 결국은 사망에 이르게 됩니다.
사람이 이렇듯 사망에 이르렀을 때, 사망과 같은 어려움과 고통과 괴로움이 올 때, 그것을 시험이라고 생각하고, 오래 참으라고 하나님이 주시는 것이야.. 하고 말하면 안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시험을 주시는 분이 아닙니다.
그것은 나의 욕심을 이용해서 미끼를 던진 마귀의 유혹에 넘어가서 내가 넘어진 겁니다.
마귀가 던진 미끼를 물지 않으면, 유혹에 넘어가지 않으면, 미혹되지 않으면, 우리는 시험에 들 일이 없습니다.
낚시꾼이 갯바위에 서서 낚시대에 미끼를 달고 물에 던졌는데,
물고기들이 물지 않으면, 낚시꾼에게 잡히지 않습니다.
물고기는 죽지 않습니다.
낚시 바늘에 달린 미끼가 맛있어 보여서 그것을 탁 무니까
낚시꾼이 탁 채서, 잡혀 올라오는 것이지요.
물지 않으면, 낚시꾼에 잡히지 않습니다.
시험에 들 일이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 신앙은 두 가지를 잘 하셔야 합니다.
가장 첫번째는 하나님을 가까이 하셔야 합니다.
[약 4:7,8] 그런즉 너희는 하나님께 복종할지어다
8 하나님을 가까이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가까이하시리라
하나님께 복종하고 하나님을 가까이 하셔야 합니다.
하나님께 복종하고 하나님을 가까이 하는 방법은 무엇입니까?
그것이 바로 말씀을 암송하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정확히 아는 겁니다.
아리송하고, 비스무리하게 알면 안됩니다.
그것이 하와가 뱀의 유혹에 넘어간 방법이기에 우리는 말씀을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반드시 말씀을 암송해야 합니다.
그리고 기도하시면서, 주님와 함께 시간을 보내셔야 합니다.
그래서, 이번주 부터는 말씀 암송하시면서, 말씀 암송 몇 번을 하셨는지 쓰시고,
또 주여... 하고 기도도 40번. 이렇게 쓰십시오.
암송 올리실 때도 적당한 자리에 주여기도 40번 이렇게 올리시면 좋겠습니다.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150번 6번 1번 40번 아멘.
이렇게 해서 올리시면 됩니다.
꼭 말씀 암송과 기도를 하셔야 합니다.
그것이 매일 주님과 가까이 하는 방법입니다.
두 번째로, 마귀를 대적해야 합니다.
[약 4:7] 그런즉 너희는 하나님께 복종할지어다 마귀를 대적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피하리라
마귀를 대적해야 합니다.
즉, 대적 기도를 해야 합니다.
그래서 신앙 생활은 두 축으로 움직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복종하면서 하나님을 가까이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마귀를 대적해야 합니다.
왜요? 마귀가 우리를 미혹하기 때문입니다.
마귀가 우리를 넘어뜨리려고 작전을 세우고, 우리는 공격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마귀의 공격에 넘어지고선 하나님이 하셨다고 하면 정말 곤란합니다.
오늘 본문에 보시면,
바울이 데살로니가 성도님들을 굉장히 보고 싶어 했습니다.
마음 같아서는 너희들 얼굴을 보고 너희들과 교제의 떡을 나누면서 함께 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습니다.
vs 17. 형제들아 우리가 잠시 너희를 떠난 것은 얼굴이요 마음은 아니니 너희 얼굴 보기를 열정으로 더욱 힘썼노라
사랑하는 사람을 보고 싶은 것은 당연하지요.
바울이 2차 전도 여행 때 세운 교회가 데살로니가 교회인데, 이 교회의 성도님들을 열정적으로 정말 만나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데살로니가 성도님들을 볼 수 없었습니다.
왜요?
vs 18. 그러므로 나 바울은 한번 두번 너희에게 가고자 하였으나 사탄이 우리를 막았도다
누가 바울을 막았습니까?
사탄이 막았습니다.
사탄이 얼굴을 보지 못하도록 막았습니다.
그래서 결국은 보지를 못했습니다.
사탄이 바울이 가는 길을 막은 겁니다.
그렇다고 한다면, 우리의 길도 사탄이 막을 수가 있습니다.
우리가 복을 받는 길을 사탄이 막을 수가 있습니다.
물론, 하나님이 막으시는 경우도 있습니다.
바울이 전도하려고 할 때, 아시아에 복음을 전하려고 했으나, 주님이 막으십니다.
[행 16:6,7] 성령이 아시아에서 말씀을 전하지 못하게 하시거늘 그들이 브루기아와 갈라디아 땅으로 다녀가
7 무시아 앞에 이르러 비두니아로 가고자 애쓰되 예수의 영이 허락하지 아니하시는지라
바울이 생각하던 곳이 있었는데, 주님은 그곳으로 가기를 원하지 않으셔서 막으십니다.
그 때, 꿈에 바울이 환상을 보는데,
[행 16:9,10] 밤에 환상이 바울에게 보이니 마게도냐 사람 하나가 서서 그에게 청하여 이르되 마게도냐로 건너와서 우리를 도우라 하거늘
10 바울이 그 환상을 보았을 때 우리가 곧 마게도냐로 떠나기를 힘쓰니 이는 하나님이 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라고 우리를 부르신 줄로 인정함이러라
바울의 총 3차 전도 여행 중 이것이 바로 바울이 2차 전도 여행 때 일어난 일입니다.
2차 전도 여행 때에, 데살로니가에 바울이 방문하고 거기에 교회가 세워집니다.
주님이 막으시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 때, 우리는 순종해서 주님의 인도하심을 구해야 합니다.
주님 어디로 가야 합니까?
주님, 내가 무엇을 해야 합니까?
이렇게 겸손히 주님께 엎드려서 주님의 인도하심을 구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경우는 사탄이 길을 막은 겁니다.
vs 18. 그러므로 나 바울은 한번 두번 너희에게 가고자 하였으나 사탄이 우리를 막았도다
사탄이 길을 막는 경우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 때 필요한 것이 바로 대적기도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사탄이 나의 길을 막고 있는대로 불구하고 그것이 사탄이 막고 있다는 것을 모른다는 겁니다.
이것이 얼마나 안타까운지 모릅니다.
부부가 싸움을 했습니다.
아주 사소한 것으로 말다툼이 이어지고, 서로 감정이 상하고, 마음을 닫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서로 대화도 안합니다.
서운한 마음이 들기도 하고, 지난 날에 내게 이렇게 했지 하면서 원망의 마음도 듭니다.
여러분, 이것이 하나님이 하신 일일까요?
아니면, 마귀가 한 일일까요?
보통은 마귀가 한 짓이라는 것을 모릅니다.
마귀는 절대로 자기가 했다고 말하지 않으니까요.
얼마나 억울합니까?
마귀에게 속아서 서로 미워하고 싸우고 있다니...
사랑하며 살기에도 시간이 부족한데, 용서하지 못하고, 미워하고 싸우면서 주님의 말씀과 다르게 사니 얼마나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겠습니까.
부부의 갈등 뿐 아니라 고부 갈등도 있지요.
시어머니와 며느리의 갈등.
왜 예수 믿는 시어머니가 며느리를 괴롭힙니까?
서운하다고 하고, 섭섭하다고 하고, 그것도 못하냐고 하고, 우리 교회 성도님들은 그렇지 않은데, 얼마나 갈등이 있는지 모릅니다.
그것이 무엇 때문에 그렇습니까?
그것이 바로 귀신의 역사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귀신의 역사인지 모릅니다.
그냥 자연스러운 것으로 생각을 합니다.
왜 삐지고, 왜 성질내고, 왜 욕심부리고,
왜 나누어주지 못하고,
왜 용서하지 못하고,
왜 섬기지 못하고,
왜 감사하지 못하고,
왜 주일에 주님께 예배를 못드립니까?
그것이 사탄이 막는 겁니다.
사탄은 주님의 뜻을 거스리도록 막습니다.
사탄은 말씀인 진리대로 살지 못하게 합니다.
말씀과 다르게 살면서도 그것이 말씀과 다르다는 것을 모릅니다.
아내는 남편에게 복종해야 합니다.
주님 안에서, 말씀과 위배되지 않게 복종해야 하는 한계가 있습니다.
그것이 성경의 진리입니다.
그런데, 요즘, 젊은 아내들이 남편에게 복종 안합니다.
왜요? 이것이 다 사탄에게 속고 사는 겁니다.
남편은 거룩한 손을 들어 기도하고, 아내를 자기 몸처럼 죽기까지 사랑해야 합니다.
이 말은 아내가 원하는 것은 다 들어 주어야 합니다.
남자는 자기가 원하는 것 다 하잖아요.
왜요? 자기를 사랑하니까요.
그렇듯 아내가 원하는 것은 다 해주어야 합니다.
그것이 사랑입니다.
물론, 한계도 있지요.
자신의 능력이 되는 한 하셔야 합니다.
돈이 없는데, 아내가 원한다고 사채 얻어서는 안됩니다.
그런데, 아내를 사랑하지 못하는 남편은 왜 그런 겁니까?
그것이 바로 사탄의 역사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느냐?
사탄을 대적해서 쫓아내야 합니다.
예수 이름으로 떠나갈지어다... 라고 선포하셔야 합니다.
사고를 일으키고,
싸움을 일으키고,
미워하고 용서하지 못하게 하고,
주님이 주신 복을 빼앗아 가고,
일터와 사업을 막고 있고,
건강을 빼앗아 가고,
진리의 말씀을 지키지 못하게 하고,
감사하지 못하게 하고,
원망하고 불평하게 하고,
슬퍼하고 좌절하고, 우울하게 하고, 등등
지옥에서 올라오는 각종 저주들을 가져다 주는
악하고 더러운 영들, 귀신들을 쫓아내야 합니다.
대적기도해서 물리쳐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승리하신 주님을 쫓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매일 귀신만 쫓아내야 하느냐?
모든 어려움들이 다 귀신의 역사냐?
그것은 아닙니다.
내가 밥을 안먹어서 배가 고픈데, 이것이 귀신의 역사라고 하면 곤란합니다.
그것은 물리적인 자연적인 것입니다.
이정도 분별력은 있어야 합니다.
또한 우리는 주님을 찬양하고 경배하며 감사하는 자로 우리를 부르셨지, 귀신 쫓아내는 일로 우리를 부르지 않으셨습니다.
그것은 가볍게 한 두 번 대적기도 하면 끝.
우리는 주님께 집중하셔야 합니다.
주님을 찬양하고, 경배하고, 말씀을 암송하고, 주여 하면서 부르짖어 기도하고
그렇게 주님께 집중하지만, 간혹 기도하다가 이것이 귀신의 역사구나... 하는 깨달음이 오면, 그 때, 대적기도 하시면 됩니다.
성령님의 감동이 옵니다.
그 감동에 따라서 기도하시면 됩니다.
기도를 하지 않으면 모릅니다.
기도를 하셔야 합니다.
그러면, 영의 감각이 살아나서 그냥 압니다.
아... 귀신의 역사구나.
그래서 쫓아내면 됩니다.
문제는 이것이 귀신의 역사이고 대적기도하면 끝나는데,
그것을 모르고 방치하면, 유혹에 넘어가서 죄를 짓고, 사망에 이릅니다.
그러니까.
그것을 미연에 방지하고, 자기 욕심에 끌려가지 않기 위해서 늘 깨어 기도하며, 진리인 말씀을 암송하시면서 승리하시는 삶을 사셔야 합니다.
복을 받기는 쉬워도 유지하기를 어렵습니다.
그래서 세어나가는 것이 없도록 하나님을 가까이하시고, 마귀를 대적하시면서 영적 여정에 늘 승리하시며 복을 받아 차고 넘치는 은혜를 누리시기를 축복합니다.

